연극을 좋아해서 이것 저것 많이도 보았지만 그 중에서 안톤 체홉의 연극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적은 별로 없다. [벚꽃 동산], [갈매기] 등등.. 특히 [갈매기]는 전에 한번 보았는데, 내가 느낀 것은 이 작품 정말 무대화하기 힘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무슨 큰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와중에 인간 내면의 치열한 갈등을 리얼하게 그려내어야 하는 만큼 여간해서는 관중의 마음을 휘어잡기가 힘드리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작품성으로 보아 도 일견 쉬워 보이지만 자잘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가는 중에 작품상으로 드러내는 메시지 가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통상 이런 극을 보러 갈 때면 나는 아예 대본을 외우다시피하고 간다.
그런데 이번에 제 24회 부산연극제를 개최하면서 이 [갈매기]가 공연되었다. 영화와 연극, 음악회를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보니, 이번에는 주로 영화관을 많이 찾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부산연극제를 한다는 소식을 귓결로 듣기는 들었지만, 어느새 막바지로 접어들게 될 때까지 한 작품도 접하지 못하다가 친지에 의해 자유바다에서 공연하는 [안녕! 갈매기] 초대권을 얻게 되었다. 저번에 한 이 작품 경험에 견주어보면 일말의 불안감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연극 작품을 접하고 싶어 이번에 관람하기로 했다.
4월 12일 늦은 7시 30 분 시민회관 소극장. [갈매기]라는 작품은 작품 자체로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창작극처럼 일일이 줄거리를 더듬어 갈 필요는 없다. 이번에 공연된 작품은 정경환에 의하여 재구성된 작품이기는 하지 만 큰 기둥 줄거리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몇몇 곁가지에 있는 배역들만 제거해 버린 것을 제외하고는.. 그러니 문제는 정경환의 연출과 배역들의 연기 그리고 기타 연극적 문법만 살펴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 후기도 그런 측면으로 서술될 것 같다.
그런데 한마디로 결과는 어떠한가? 이때까지 내가 체험했던 안톤 체홉의 작품성에 이르 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원작가의 희곡을 '읽게' 되면 우리는 무대를 '상상'하면서 읽게 된다. 아니 무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을 상상하며 읽게 된다. 그런데 그 상상의 수준 은 독자의 문학적 감수성 여하에 따라 대단히 다양한 층위로 펼쳐지게 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심도 있는 체험의 육화를 접하게 된다. 내가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이청준의 소설만큼의 감명을 받지 못했던 것도, 오페라 공연이나 DVD 영상물을 보면서 대본과 함 께 오페라 CD를 들을 때만큼의 감명을 받지 못했던 것도 일단 문자로 상상을 자극하는 차 원을 넘어 그것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눈앞에 펼쳐 보일 때, 문자가 자극하는 상상력의 고도 를 획득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번 [갈매기] 공연의 경우도 어 김없이 그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우선 제일 먼저 그슬리는 것은 배우들의 대사 전달력과 연기력이다. 작가역을 맡은 [김상훈]을 제외하고는 어느 연기도 관중의 몰입을 일으킬만큼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는 그냥 심드렁하게 흘러갈 때는 그냥 일상적인 톤으로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감정 폭발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연결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이루어 져야 하는데, 평평하게 감정이 흘러갈 때 충분한 힘을 내재하고 있다가 그 억눌린 힘을 한 데 모아 한꺼번에 터뜨린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돌출적이고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배우들의 동작선이 소극장 무대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았고 갈팡질팡하고 있어서 너무나 혼 란스러웠다. 어찌 보면 배우들이 그 소극장 무대의 크기도 너무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우들의 대사의 토온 문제인데 어째서 그게 그리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거 발성법 문제인가? 부드럽고 매끄러운 가운데서도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왜 안 느껴지지?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대사를 할 때마다 불안해 죽겠다. 그러다 보니 무슨 연극에의 몰입이 되겠는가? 대사가 나올 때마다 생경하기만 하다.
이 연극이 전체적으로 다소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 전체가 그렇게 되어 관중들을 숨막히게 할 필요는 없다. 연출 방식에 따라서는 우직남(원작의 메드 베젠코)과 소녀(원작의 마샤)의 티격댐, 그리고 오빠(원작의 쏘린)의 행투는 충분히 코믹하 게 그려서 그것을 작품 전체의 무거움과 대조를 시키며 작품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일부분 그것이 실현되기는 하지만 연기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으니 그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배경음악의 설정이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대사를 갉아먹기 일쑤인데, 배경음악의 음량을 조절하면서 그런 점에 별로 신경을 쓴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이 연극에 몰입이 되지 못하게 한 것에는 이런 일차적 이유에도 몇 가지가 더 있 다.
원작을 보면 트레블레프가 만든 연극을 어머니인 아르카디나가 보고 무어라무어라 쫑알거리다가 트레블레프가 화를 내고 공연을 포기하는 방면이 나오는데, 이 곳의 처리가 좀 애매하다. 그러니까 공연중에 우직남과 소녀가 관중석에서 티객대고 그것 때문에 아들이 화를 내고 나가버린다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어머니인 여배우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반문하며 의아해 한다. 그래!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마는 원작에서보다는 오히려 밀도가 더 떨어진 것이 아닐까? 왜 하필 이런 식으로 각색한 것일까?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연극의 기본 구도를 보면 처음에 어머니가 여배우로 그의 애인이 작가로 등장하면서 거짓 이미지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다가 작품 마지막에 가면 아들은 유명 작가가 되고, 그의 연인인 비련녀(원작의 니나)는 배우가 되어 허무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끝난다. 내용상으로 보면 이미지가 주는 거짓 인상에 속아, 삶의 허위 속으로 빠져든 인간 군상들이 겪어야 하는 좌절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들이 유명작가가 되려고 욕망할 때 그가 그리고 있던 유토피아 상이 작품상으로 확실히 부각되었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련녀가 지향하는 욕망 구도가 오히려 아들의 욕망 구도로 치환되었어야 할 것 같다. 비련녀는 소설가를 보고 유명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고 그의 욕망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차라리 어머니인 여배우하고는 거의 접촉이 없는 상태로 계속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처음 구조와 결말의 구조를 잇는 구조틀은 한꺼번에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무어가 무언지 모를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갈매기]인 것에 상도해 보면 과연 누가 [갈매기]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비련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일생을 호수가를 떠나 살지 못했으며 그러면서도 무언 가 꿈을 찾아 호수를 떠났으면서도 다시 날개가 꺽인 채 호수가로 돌아와야 했던 비련녀 쪽으로 연출의 무게 중심이 옮겨졌어야 할 것 같다.
체홉의 원작은 상당히 많은 갈등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연출의 방향이 결정되면 그 방향쪽으로 연극이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 연극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각색을 했다고 하지만 어슬프게 체홉의 흉내를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상당히 리얼하게 드러난 것은 소설가의 고뇌이다. 그것은 일부 [김상훈]의 연가력에도 기인한 바 있겠지만 차라리 아들의 소설가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열등의식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할 정도로 리얼했다.
작가가 지닌 그 내면의 번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들은 그가 단지 자기 어머니의 정부라고 하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소설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비련녀는 어찌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여자일 수도 있다. 관중들은 처음에는 그 소설가를 상당히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인식하다가 그의 내면 속의 고뇌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에게 인간적인 공감을 하게 된다.
예술이나 예술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안다. 진정한 예술가는 그의 삶에 깃든 낭만을 작품 속에 다 쏟아 붓고, 그는 빈 껍데기의 너무나 비낭만적인 존재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그것은 이 작품은 그 소설가를 통해서 너무나 리얼하게 잘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연극이라는 것이 배우 한 사람이 잘 한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가? 이 연극에서 차라리 그는 부인물일 따름이다. 연극의 초점은 아들과 비련녀 쪽으로 모이고 있다. 그들을 중심부에 놓을 때, 그 주변으로 겉멋만 잔뜩 든 여배우인 어머니와 그의 정부인 소설가가 놓이고 또 다른 면으로 그들의 주위를 떠돌며, 그들과 같은 연정을 나누는 우직남과 소녀가 놓이고, 또 다른 면으로 그들과 관계하는 오빠가 놓인다. 각 배역은 그들에 놓이는 무게 중심의 차이에 따라 감정의 톤과 고도를 달리해야 할 것이고, 등장할 때마다 각 배역들의 특성을 부각시켜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구조화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모두다 파편처럼 흩어진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되어서야 진정한 연극의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난 실망했다. 만약 구조화가 잘 되었다면 스스로 내면의 고뇌에 빠진 소설가와 마지막에 유명 작가가 된 뒤에 연인을 죽이고 자결할 수 밖에 없었던 아들과의 연결고리도 드러났을 것이고, 어쨌든 대충 가정을 이루며 사는 우직남과 소녀와 달리 계속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아들과 비련녀와의 대조적 연관성도 드러났을 것이다.
그리고 오빠와 여배우 사이의 인간성에 있어서의 속물성의 차이도 드러났을 것이다. 그 모든 구조 위에 비련녀의 방황을 놓았을 때, 그것이 진정 [갈매기]로서의 그녀의 자질과 함께, 중간에 갈매기를 쏘아 죽인 아들과의 연결 고리도 찾아지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하나의 유기체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그 유기체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흩어진 것 같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배우의 대사 전달력과 연기력 부족, 그리고 무대 공간 활용에 있어서의 혼란상, 각색에 있어서의 문제점, 연극적 장치의 혼선과 어울려 더더욱 악화된 것 같다. 아직 [갈매기]라는 작품을 제대로 된 연극으로 보기에는 시간이 좀 이른 것 같다. 난 실망하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연극 행위가 아무런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요사이 연극이 뮤지컬과 교묘히 병합되면서 연극인지 뮤지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작품이 범람하면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연극이 가벼운 오락거리로 전락한다는 느낌 때문에 요사이 내가 많이 접하는 영화와는 달리 뭔가 특별하고 가치있는 체험을 해 보고자 하는 내 마음이 끊임없이 배반되기 일쑤였다면 최소한 이 연극은 연극적 세계로 쉽사리 재현되지 않는 어려운 작품을 일단은 무대에 올려 시험해 보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내가 아까 이야기했던 소설가의 고뇌를 리얼하게 그려내었다는 부분적인 가치와 더불어 이런 것은 부산 연극의 소중한 자산이다. 내가 느낀 문제점은 오히려 나 자신의 연극 체험의 일천함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같은 연극을 한 번 더 본다면 그때는 다른 느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으리리라는 가능성도 점쳐 볼 수 있다. 비록 현재 시점에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 만족스럽지 못함을 문제 인식을 통한 가능성의 발견으로 남겨두자.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이 있고, 설사 그 길이 멀고 힘들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힘들게 연극 작업을 하는 부산 예술인들에게 이 시건방진 관객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일 것 같다. 언젠가는 그들을 향해 오늘과는 다른 정반대의 덕담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또 그것을 믿으며
이 후기를 닫고자 한다.
부산 연극을 사랑하는 부산 시민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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